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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

미군 양복 만들다 세탁소 차려 "철거 전날까지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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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맨8Lv 116
조회 수779

1970-1980년대는 맞춤양복점이 잘 되던 시기였다. 당시 양복점 재단사는 신랑감으로도 인기가 있었다. 고급 기술자로 봉급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1990년 들어 기성복이 대유행하면서 양복점은 점차 사라지고, 그 많던 재단사들도 세월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 기지촌에서 미군양복 기술자로 시작해 재단사, 맞춤양복점 주인, 세탁소 사장으로 세월과 변화를 견뎌 온 이충현(67)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선유리에서 60년 넘게 사셨어요. 어떤 동네인가요? "여기 미군부대가 있었지. 캠프 펠헴이라고. 나중에 게리오언으로 바뀌었는데. 알씨포(RC#4)도 있었어. 그 안에 야구장, 볼링장, 클럽... 별 게 다 있었어. 미군은 포병, 보병, 기병 9개 부대가 주둔했으니까 잘은 몰라도 만 명은 넘었을 거야. 게네들이 근무 끝나고 저녁시간에 나오면 여기 신작로(사임당로)가 미군들로 꽉 찼을 정도니까." - 어떻게 하다가 미군 양복을 만들게 되었어요? "중학교 막 졸업하고서니까 열일곱 살이었나. 그때 부모님이 고향 떠나와 객지에서 힘들게 사시는데 누나가 셋이지 동생들도 있는데 장남인 내가 학교를 다니느니 돈이나 벌자 그랬던 거지." - 그때 양복점 이름 기억나세요? "뉴욕양복점. 나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지. 같이 입사한 애들은 열다섯 살 그랬어. 처음에는 심부름하니까 월급으로 받았고... 2500원 했나? 한 3년 일하면서 미싱 기술 배우고 나서는 객공이라고 만드는 개수대로 받았지. 바지는 하루에 서너 개 이상 만들고 우와기(상의)는 한 개 만들면 많이 만들어. 어깨 여기가 공이 많이 들어가거든. 바지는 하나에 250원 받았나..." - 얼마동안 일하셨어요? "거기서 군대 갈 때까지 했고... 군대 가기 바로 전에 동북기업이라는 데서 잠깐 일했지. 미군양복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한 백 명 정도 일했어. 전부 월급 말고 객공으로 받는 거야. 군대 갔다 와서는 문산 모드양복점이라는 데서 한국인 양복을 만들었지. 거기서는 재단사로 일했지. 동북기업에서는 미싱 기술, 모드에서는 양재 기술, 원단 공급 이런 거 배웠지." - 양복 만드는 '공장'이 있었군요? "그때는 그런 양복 공장이 많았어. 왜냐하면 그때 당시 미군부대는 안에 양복점이 다 있었는데 '강 건너' 부대는 그런 게 없었거든. 그러면 영업하는 사람이 치수 재는 줄자 가지고 들어가는 거야. 조그맣게 점방을 차려 놓고 미군이 양복 맞추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어깨, 기장 이런 거 치수 재 가지고 봉일천 일대 양복 공장에 맡겨서 만들어갖고 납품하는 거야. 우리도 주문이 많아서 맨날 엄청 바빴어. 그때 '양복쟁이'라고 친구들한테도 인기가 많았지. 보기만 하면 술 사달라고 쫓아오는 거야. 하하하. 그때 족쟁이도 있었어. 신발 만드는 사람. 미군들이 양복 맞출 때 구두도 같이 맞추니까 족쟁이도 좀 알아줬어." - '강 건너' 부대는 어디를 말하는 걸까요? "저기 장단반도, 다리 건너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런 데는 전방이니까 아무래도 부대가 작지. 뭘 하려면 여기로 외출 나와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거야. 거기에 미군사격장이 있었는데 나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이 탄피 주으러 다녔어. 탄피가 신주야. 그거 팔면 돈이 됐거든. 근데 걸리면 잡혀 가. 우리 부모님도 한 번 그랬던 적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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