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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제

대한민국 이끈 검찰총장들, 지금도 검찰이 감추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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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맨8Lv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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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권 초반까지 각각 대한민국 5대, 7대, 8대, 10대 검찰총장을 지낸 이들의 명단이다. 그런데 이들에겐 불편한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4인 모두 '일제강점기 부일 협력 등 친일반민족행위에 참여한 이력'을 이유로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민복기(1913~2007) :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돼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각종 재판에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체포된 이초생 재판에, 같은 달 28일에는 비밀결사 상록회를 조직한 남궁태·이찬우·문세현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40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고, 여러 차례 승진을 거친 뒤 45년 6월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박승준(1896~1967) : 1928년 11월 쇼와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을 선고받은 박제영의 재판과 공갑룡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같은 해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조병철, 유용희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1936년 4월 훈6등서보장을 받았다. 해방 후인 46년 9월 진주지청 검사장에 임명됐다. 48년 11월 대구지검 검사장에, 49년 11월 대검 차장검사에, 52년 4월 광주고검 검사장에, 57년 10월 서울고검 검사장을 거쳐 58년 3월부터 60년 5월까지 대검 검찰총장을 지냈다. 이태희(1911~1999) : 1941년 1월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됐으며, 41년 8월부터 12월까지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를 겸했다. 43년 해주지법 검사에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해당 기간 중 '예방구금위원회'의 위원도 맡았다. 해당 위원회는 일제에 반하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마련한 조직이다. 해방 후인 45년 11월부터 법무국 특별검찰청 검사에 임명됐다. 정부수립 후인 48년 11월 대검 검사에 임명됐고, 이후에는 법무부 검찰국장과 서울지검 검사장도 맡았다. 50년 6월부터 51년 8월까지 부산지검 검사장을 맡으며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군검경 합동조사단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이후 이화여대 법정대학 교수를 지낸 뒤 1960년 4.19혁명으로 출범한 허정 내각에서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5.16쿠데타 후 공직에서 밀려나 변호사로 활동했다. 정창운(1906~1968) : 1940년 1월 평양지법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된 뒤 평양지법 검사대리를 겸했다. 41년 10월 경성지법 검사국 예비검사를 거쳐 42년 3월 경성지법 검사에 임명됐다. 43년 3월 광주지법 장흥지청 검사로 옮겨 해방 때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45녀 11월부터 광주지법 순천지원 검사, 정부수립 후인 48년 11월부터 대검 검사, 52년 4월 대검 차장검사, 55년 10월 대구고검 검사장, 58년 3월 서울고검 검사장을 역임하다 60년 5월 퇴직했다. 퇴직 후 동국대에서 교수를 지내다 63년 2월 검찰에 복귀해 대검 검찰총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이끈 검찰총장들, 지금도 검찰이 감추는 과거대한민국 이끈 검찰총장들, 지금도 검찰이 감추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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